트로이, 전설에서 실화로
트로이 전쟁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3,000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유명한 사건임에도 트로이 전쟁에 관해 기록한 어떤 역사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로 있었던 전쟁인지 확인불가란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이 전쟁이 세계적 관심을 받게 된 이유는 호머의 일리야드가 기여한 바가 크다.
일리야드는 기원전 700년경에 쓰인 대 서사시다. 그리스 작가 호머의 작품으로 트로이를 배경으로 쓰인 오딧세이와 더불어 서양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일리야드가 트로이 전쟁의 원인과 경과를 그리고 있는 반면 오딧세이는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오딧세우스가 겪는 모험을 노래하고 있다. 이 두 서사시는 트로이 전장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물로 수 천년간 유럽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서사시는 기본적으로 민족이나 국가의 전설을 신이나 영웅 중심으로 적은 시다. 역사적 기록물이 아닌 창작물이란 얘기다. 그래서 이 서사시의 존재만으로 트로이가 실존했다고 단정할 순 없다.
이렇게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나 트로이 목마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일까?
1870년 슐라이만이 힌트를 찾아내기 전까지 그 답은 아니였다. 슐라이만이 트로이를 찾아나서기 시작했고 그가 주목한 지역은 터키 아나톨리아 북서쪽에 있는 히살릭이었다. 유럽과 중동,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히살릭은 해상 무역로의 중심지이자 바다를 통한 교통로의 거점이었다.
히살릭 언덕이 트로이라고 확신했던 슐라이만은 총 7차례의 발굴을 실시했고 그 결과 언덕 지층속에서 9개의 도시 흔적과 13개에 달하는 서로 다른 시대적 유물들을 발견한 것이다. 도시들이 겹겹히 쌓여있는 구조로 흙속에 파묻혀 있었고 그 역사는 무료 5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슐라이만이 사망하자 그의 조수였던 빌헬름 도프펠트(Wilhelm Dorpfeld)가 발굴을 계속했다. 발굴단의 관심을 끈 건 지상으로부터 다섯번 째, 트로이 7a 유적층이었다. 그곳에서는 성채를 중심으로 한 23군데의 방어벽과 11개의 게이트, 돌로 포장된 도로, 5개의 방어 성채로 둘러싸인 일반인 거주지역등이 발굴되었다. 일리야드속 트로이와 비교해서 시기적으로 형태적으로 가장 유사해 보였다.
일리야드에는 트로이의 성벽중 유독 한 부분이 취약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트로이 7a에서는 호머의 묘사처럼 다른 곳보다 취약한 성채가 발굴됐다. 일리야드에서 "일리오스의 거대한 탑들"로 묘사된 것처럼 성벽을 따라 건설된 큰 탑들도 찾아냈다. 또한 도시 전체에 남아있는 광범위한 화재와 학살의 잔재는 Troy 7a 문명이 대규모 전쟁의 결과로 멸망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역시 일리야드가 설명하고 있는 트로이의 종말과 일치하는 흔적이었다.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국가들 중 가장 막강한 방어력을 갖췄을 것으로 평가받는 성채는 스파르타가 트로이 공격을 위해 전체 그리스 연합군을 긁어모은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었다.
발굴단은 이 모든 자료를 취합해서 트로이 7a가 트로이 전쟁의 실제 무대라는 결론을 내렸다. 즉 트로이는 실존했던 도시였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결론이 맞는 지 검증하려는 시도가 최근 있었다. 일리야드에서 묘사한 전쟁상황과 트로이 유적의 주변 지리를 대조해 전쟁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2003년 국제 조사단이 구성되었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George Rapp 교수팀, 터키 이즈미르 Ege 대학의 Ilhan Kayan 교수팀, 아일랜드 더블린 Trinity 대학의 존 V. Luce 교수팀등이 참여했다.
그들은 일리야드속 트로이 전쟁의 전투 장면과 주변 지리를 현대 기술의 도움으로 대조했다. 일리야드는 그리스 원정군의 캠프가 트로이 성에서 멀지않은 스캐맨더(Scanmander)강 입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3000년 전 지형을 복원하자 성에서 5km나 떨어져 있던 해안선은 일리야드 묘사처럼 트로이성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스캐맨더 강을 포함해 복원된 당시 지형도는 일리야드의 전투 기록에 등장하는 여러 지형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국제 발굴 조사단 역시 발굴된 유적이 일리야드 속 트로이가 맞다는 최종 평가를 내렸다. 이로써 트로이는 상상력의 산물이 아닌 역사적 사건 기록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현대 기술로 복원된 트로이 성의 모습은 이렇다. 성벽으로 보호받는 성채를 중심으로 일반인 거주단지로 구성된 이 도시는 총 면적 30만 평방미터, 성채 규모 2만 평방미터를 가진 요새로 실제 거주민은 약 5,000명 정도였다. 그리스, 발칸 지역, 아나톨리아 지방의 교차점에 위치한 도시, 바다를 통한 접근이 용이했던 이 곳이 바로 실존했던 트로이의 모습이다.
발굴 내용과 약간의 상상력을 중심으로 재 구성해 본 트로이 전쟁의 실체는 이렇다.
기원전 1200년 경 트로이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경쟁자 관계였다. 트로이는 아나톨리아와 소 아시아에 위치한 도시 국가들의 맹주였고 지중해로 뻗어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막강한 지중해 세력을 형성해 반대로
아나톨리아 지역을 거쳐 흑해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해상 무역로의 주도권을 둘러싼 군사적 갈등이 높던 시대로 트로이와 고대 그리스 사이에선 어떤 사건이던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결정적인 불씨를 당긴 사건이 일어났다.
얼짱 미녀 헬렌의 아버지는 스파르타의 왕이었다. 당연히 헬렌은 스파르타의 공주였다. 그녀가 아버지의 강요로 정략적으로 메넬레우스와 결혼하자 헬렌은 불행해졌다. 왕이 되기위해 자신을 이용한 메넬레우스 때문에 애정없는 결혼생활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무역항로를 따라 스파르타에 들른 트로이 왕자 패리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눈 맞은 이 커플은 야음을 틈타 트로이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고 헬렌덕에 왕위를 물려받은 메넬레우스는 왕권에 심각한 위협을 받는다.
메넬레우스와 그의 동맹자 오딧세우스는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먼저 사절을 보내 왕비를 곱게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 당했다. 이제 남은 선택은 전쟁 하나 뿐이었다. 어차피 에게해와 흑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할 운명이었다. 메넬레우스는 동생 아가멤논을 시켜 전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 병력지원을 요청했고 총28개의 서로 다른 부대가 연합군에 합류했다. 바람난
와이프 찾아오기 위해 구성한 팀치곤 대박이다.
그리스 연합군은 각 지역에서 파견된 장군들로 지휘부를 구성했다. 아가멤논(Agamemnon), 아킬레스(Achilles), 아약스(Ajax), 디오메드(Diomed), 네스토르(Nestor), 오딧세우스(Odysseus), 패트로클로스(Patroclus)등이 지휘봉을 잡았다. 이들에 맞서 트로이는 소 아시아 동맹국들과 손을 잡고 결전을 준비했다. 일리야드는 그리스군이 50개의 노를 갖춘 총 1,200척의 전함을 동원했다고 적고 있다. 한 척당 전투요원 50명, 비 전투요원 50명 도합 100명 씩 승선하면 총 12만에 달하는 대군이다. 하지만 실제로 연합군의 규모는 트로이 방어군의 두 배 정도인 만 명 정도였을 것이다. 고대 문학속 숫자 뻥튀기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늘 있어왔으니 접어주자.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다. 2차 원정에 오른 그리스군은 드디어 트로이성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높은 성벽과 성채로 보호받던 트로이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내륙쪽을 통해 동맹국들의 지원을 받는 트로이의 숨통을 완전히 끊기는 어려웠다. 전쟁은 군바리 숫자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그리스 지휘관들이 몰랐던 게다. 트로이 주변 지역을 초토화 시켰지만 물자보급로는 완벽히 차단되지 않았고
결국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렀다.
상대적으로 보급선이 길었던 그리스 연합군은 전쟁을 서둘러 종결해야 했다. 그래서 최후의 일격에 나선다. 오딧세우스가 이끄는 특공대가 야밤을 틈타 트로이의 성벽을 타고 넘은 것이다. 성문은 열렸고 그리스군은 물밑듯이 밀려 들었다. 오랜 전쟁으로 생존자 대부분이 노인, 부녀자, 아이와 병자들 뿐이었지만 그리스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학살에 나섰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목마는 성의 함락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호머가 만들어낸 설정일 가능성이 높다. 뜬금없이 전장에 나타난 목마를 성안으로 들일만큼 트로이 사람들이 띨띨했을리 없고 더군다나 그 안에 병사들이 숨어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만큼 전쟁의 문외한들이 아니었다.
어쨋든 오딧세우스의 영웅적 행동으로 트로이는 함락되었고 그는 전체 그리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호머가 그만을 위한 서사시, 오딧세이를 별도로 쓴 이유가 그 때문일 것이다. 트로이를 함락한 그리스 연합군은 보복을 저질렀다. 도시 전체를 불태웠고 노예로 팔 수 있는 이들을 제외한 모든 주민들을 학살했다. 사건의 발단이었던 패리스 왕자는 이미 함락 전 목숨을 잃었고 헬렌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왕권의 정당성 때문에도 헬렌이 필요했던 메넬레우스는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일리야드는 메넬레우스가 그녀를 다신 만난 순간 그 아름다운 미모에 분노가 화라락 녹아내렸다고 적고있다. 사실이든 아니든 자고로 여자는 이쁘고 볼 일인 듯 싶다.
트로이의 왕자였던 아에니아스(Aeneas)와 일부 주민들이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달아났다. 그들은 성 앞 해변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이탈리아 티베르(Tiber) 강 입구에
정착해 제2의 트로이를 건설했다. 그들이 세운 도시가 바로 그 유명한 로마다. 트로이의 피난민들은 로마 문명의 시발점이자 Julio-Claudian 로마 왕조의 뿌리였던 셈이다.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영향권이었던 유럽인들이 이 사건에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훗날 이 사건에 영감을 받은 호머는 이 이야기에 적당한 상상력을 버무려 일리야드와 오딧세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쓰게 되고 트로이는 그 덕에 불멸의 신화로 남게되었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트로이의 후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만큼 고대 트로이를 특별하게 생각했다. 트로이를 일리움 노붐(Ilium Novum)이라 부르며 이 도시만큼은 모든 세금이 면제되는 혜택을 제공했다. 당근 세금내기 싫어하는 분들이 개떼처럼 몰렸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스인들에게도 트로이는 특별했다. 그들의 영웅적인 선조들이 묻힌 곳이자 그리스의 위대함을 만천하에 입증한 곳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은 트로이를 방문해 아킬레스와 페트로클러스를 위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종합적으로 평가할 때, 일리야드나 오딧세이, 아에네이드등에서 노래하는 트로이 전쟁은 목마 에피소드와 숫자들에 대한 뻥튀기질을 제외하곤 사실에 가깝다. 그간 출토된 유물과 지정학적 조사 내용이 이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인정한 UNESCO에 의해 트로이 유적은 1998년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트로이 전쟁이 실존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단군 신화가 사실로 증명되는 것 만큼 서양인들에게 의미있는 결론이다. 단군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다면 곰이 쑥을 먹었든 마늘을 먹었든 샌드위치를 먹었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가 실존했는 지, 진짜 헬렌의 미모때문에 전쟁이 난 건지 중요하지 않은 건 같은 논리다. 서양인들이 트로이의 실존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
서양문명을 관통하는 역사적 기원을 보기 때문이다.
[출처] 트로이 전쟁은 전설인가 사실인가?|작성자 가우디
참고 사이트 :
UNESCO에 등록된 트로이 유적 사이트 http://whc.unesco.org/en/list/849
관련 포스트 : 영화 300 -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투 http://blog.naver.com/nicklim/50101655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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