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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솔로스의 영묘, 무덤 건축물을 대표하는 대명사

액트 2019.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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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솔로스의 영묘, 세계 7대 불가사의


마우솔로스의 영묘

할리카르나소스(현재 터키의 보드룸)에 있었던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무덤이다. 약 기원전 353년에서 350년 사이에 건립되었다.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으며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뺀다면 무덤 건축물 중에 최대 규모였다. 지금은 폐허만 존재한다. 

 

마우솔로스는 할리카르나소스(터키의 보드룸)의 통치자였다. 이 영묘에는 마우솔로스와 그의 아내인 아르테미시아 2세가 안치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마우솔로스가 죽자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아르테미시아 2세는 비탄에 잠겨 그를 화장한 재를 포도주에 넣어 마시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겠노라 맹세했으며, 본인도 결국 죽은 뒤 이 무덤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건축가는 피티우스(또는 피테오스)였고 4명의 뛰어난 그리스 예술가 스코파스·브리악시스·레오카레스·티모테오스 등이 조각을 맡았다. 스코파스가 동쪽을, 브리악시스가 북쪽을, 티모테오스가 남쪽을, 레오카레스가 서쪽의 조각을 맡았다. 

스코파스는 그리스인과 아마조네스(호전적인 여성 부족)의 투쟁을 그렸고, 다른 3명은 라피타이와 켄타우로스의 투쟁 등을 그렸다.

로마의 저술가인 대(大) 플리니우스(23년 ~ 79년)에 따르면 이 영묘는 거의 정사각형으로서 그 둘레가 125 m에 이르렀다고 한다. 36개의 기둥이 둘러싸고 있고 24단의 계단식 피라미드로 꼭대기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4두 마차가 올려져 있었다고 한다. 

 

 

마우솔로스의 영묘는 11세기 ~ 14세기에 지진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마우솔로스의 영묘, 세계 7대 불가사의

1409년 십자군이 여기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는 이미 기단부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요한 기사단은 십자군 원정으로 이 지역을 점령했고, 1949년 보드룸 요새를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영묘의 잔해 석재를 이용했다. 또한 1522년 오스만 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흘러나오자 그들은 보드룸의 요새를 강화하기 위해 남아 있던 파편도 모두 성벽을 강화하는데 사용했다. 오늘날에도 이 요새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벽에서 무덤에 사용된 대리석을 찾아볼 수 있다. 후에 이 지방은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 정복되었고, 기사단이 서쪽으로 쫒겨간 이후 이 지역은 오토만 제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지마우솔레움 지상의 유적이 소멸된 후에도 지하 부분은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었고, 이 곳을 발견한 요한 기사단이었던 프랑스 리용의 클로드 기샤르는 1581년 발간한 책에서 이렇게 적었다.
"여러 방을 연결하는 복도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흰 대리석으로 장식된 무덤을 발견했다.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어 다음날 뚜껑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와서 보니 무덤은 열려져 있고 황금 조각과 옷 조각이 사방에 떨어져 있었다. 이것들은 우리가 철수한 후 약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누군가 밤에 와서 관을 열고 매장품을 도굴했을 것이다. 그 무덤 속에는 엄청난 보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기샤르는 지하를 발굴하다가 큰 발견을 했다고 생각했고 날이 너무 늦어 다음 날 다시 왔는데 그 사이에 도굴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 부부의 시신도 도둑맞았다고 생각했다. 기샤르는 주변인을 의심했는지 자신의 안위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 쓸 수 없다고 기술했다.

19세기에 영국은 보드룸 요새와 영묘의 잔해 등을 조사 발굴하였고, 프리즈 석판들은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아마존 전사들의 전투'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때 건물의 벽과 계단식 지붕의 일부를 장식 한 부분, 지름이 약 2m인 부서진 석제 전차 조각의 바퀴,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동상을 발견했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많은 복원도가 그려졌으나, 건축물이 정확히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이견이 좀 있다.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동상



1966년과 1977년 사이 덴마크 아루스 대학의 예페센 교수에 의해 영묘에 대한 발굴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기샤르가 오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애초에 할리카르나소스의 영묘는 십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굴되어 있었다. 그간 할리카르나소스가 포함된 이오니아 지방을 점령했던 세력만 10개가 넘기에 눈에 잘 띄는 마우솔레움이 십자군이 오기까지 1700년간 멀쩡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 발굴단은 기샤르가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 장식된 옷의 파편들도 발견했다. 그것들은 얇은 금판 장식, 채색 유리, 40여 개의 금판으로 된 장미 등이었다. 당시 왕과 왕족들의 옷을 장식하던 이것들은 누군가가 약탈하고 남긴 부스러기만으로도 후대인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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