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야 소피아, 중세 세계 7대 불가사의
아야 소피아 또는 하기아 소피아
아야 소피아 또는 하기아 소피아는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동방 정교회 대성당으로 동로마 제국 건축의 최고 걸작이자 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곳.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에 의해 멸망한 후 메흐메트 2세의 명으로 모스크로 바뀌었다. 터키 공화국 수립 후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시로 박물관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5년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건축의 대표작으로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건축물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 제국의 건물이라고 하여, 기독교의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슬람교와도 관련이 크며, 500년 가까이 이슬람교 신자들의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성당 옆에 있는 4개의 탑들은 미나레트라고 부른다.
하기아 소피아는 당시 세워진 그 어떠한 건축물보다도 광대한 실내 공간을 가진 건물이었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스페인 세비야의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이기도 했다. 돔의 직경만 하더라도 31.87m로, 로마의 건축물인 판테온 다음 가는 크기였으며 수백 년 뒤의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피렌체의 두오모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석조 돔이기도 했다. 하기아 소피아는 많은 정교회와 이슬람/오스만의 종교 건축물들의 기본 구조가 되었으며, 르네상스 건축물의 구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명칭인 'Αγία Σοφία'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뜻으로, 동방 교회에서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에서는 하기아 소피아, 아야 소피아,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 등으로 불린다.
최초 건립 및 두 번의 소실
하기아 소피아는 원래 정교회 대성당이며, 교회는 360년, 이스탄불이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렸을 때,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건립되었다.
40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성 크리소스톰)를 추방시키는데 수반된 난동으로 교회가 소실되어,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재건,415년에 축성되었다. 이 대성당도 현재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바실리카이며, 현재에도 일렬의 원주와 주기, 장식된 대들보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정교회 대성당도 532년 1월 13-14일 니카의 반란 도중 일어났던 대화재로, 황궁의 일부나 성 이레네 성당과 함께 다시 소실해 버린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의한 재건
두 번의 소실을 겪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즉위후 소피아 정교회 성당의 재건을 결정하였다. 이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바라며 물리학자인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Isidoros)와 수학자인 트랄리스의 안시미오스(Anthemios)에게 설계를 맡겼다. 유스티아누스는 그의 정복 사업이 그러하였듯이 이 공사에도 엄청나게 빠듯한 기한을 주고 닥달했다. 그리스인인 두 사람은 전문적인 건축가가 아니었지만 1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532년부터 537년까지 채 6년도 걸리지 않은 공사기간을 통해 당시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광대한 규모의 대성당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대성당의 건설을 위해 제국 전역에서 각종 자재들이 공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원기둥들을 징발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맞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메나스 총대주교에 의한 헌당식을 거행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왕 솔로몬의 신전을 능가하는 교회를 세웠다는 생각을 하여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 라고 외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서 재건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의 소재지로서 동방 정교회 제일의 격식을 자랑하였으며, 또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사당으로서 이용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순례자들의 기록을 보면, 대성당 안에는 현재는 없어진 시설이나 성유물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러시아인 스몰렌스크의 이그나티오스의 기록에서는, 대성당 내부에는 많은 예배당이 설치되어 있으며 노아의 방주의 문이나 성 십자가, 아브라함의 테이블 등 많은 성유물들이 안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십자군에게 털렸다.
지진으로 인한 피해
헌당식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인 553년 8월과 557년 12월 14일 2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강타한 지진으로 하기아 소피아의 상징인 중앙돔에 금이 갔고, 결국 558년 5월 7일에 발생한 지진을 견디지 못해 중앙돔이 무너졌다. 붕괴 직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이시도로스에게 즉각적인 복구를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 젊은 이시도로스는 중앙돔을 원래의 위치보다 6.25m 가량 낮추고 구조를 보강하여 건축했다.
그로부터 약 3백 년이 흐른 859년에 발생한 화재와 869년 1월 8일에 발생한 지진으로 대성당의 버트레스(half dome)가 파괴되었다가 바실리오스 1세 황제의 명령에 의해 수리되었다. 120년 뒤인 989년 10월 25일의 대지진으로 서쪽 돔의 아치가 붕괴되자 바실리오스 2세는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티리다티스에게 수리를 명령해 6년간의 공사 끝에 994년 5월 13일에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약 350년이 지난 1344년 10월에 발생한 지진으로 중앙돔에 다시 금이 가더니 2년 후인 1346년 5월 19일에 대성당 곳곳이 또 무너졌다. 이때의 피해는 8년 동안 공사에 들어가서 1354년에 끝났다.
성상 파괴와 십자군의 약탈
1204년 4월 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점령한 4차 십자군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파괴하는 반달리즘을 자행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당대의 재부가 모여 부유하기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때의 약탈로 전성기의 화려함이 괴멸되었다. 도시 곳곳에 있던 수많은 보물들이 십자군들에게 털렸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후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 이래로 동로마 제국이 열성적으로 수집해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성당에서 소중하게 모시던 각종 성유물 또한 십자군들의 손에 의해 강탈되어 서유럽으로 빼돌려졌다. 이 덕분에 동로마 제국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십자가 든 악마에 견주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이라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십자군들은 하기아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바꾸고 정복 직후 사망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시신을 매장하여 무덤을 만드는 폭거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다만 단돌로의 무덤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파괴되어 사라졌으나,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있다. 2층 오른편에 가보면 Henricus Dandolus라고 라틴어로 쓰여진 돌판을 볼 수 있는데 거기가 무덤 자리로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이미 그 위치가 알려져 있었다. 다만 아무래도 죽은 사람 무덤이라 그런지 터키인들도 건드리긴 영 껄끄러웠는 듯하며 19세기 이탈리아에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 돌판을 세웠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탈환된 후에야 황폐해진 하기아 소피아도 정교회 성당으로 환원되었으며 1317년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가 대성당 북쪽과 동쪽에 새로운 버트레스(버팀대)를 증축했다.
오스만 제국 시대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거한(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드 2세는, 그 날 오후에 도시로 입성하자마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 고 외치면서 영토 확장 목적의 달성을 기념하기 위해 대성당의 흙을 자신의 머리에 뿌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이 대성당을 몰수, 모스크로 사용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때에 대성당과 연결되어 있는 총대주교 자택의 통로는 파괴되고 대성당 내부는 십자가가 떼어지고 성화(이콘)는 석회칠로 덮어지고 메카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라브가 더해졌다. 그 후, 네 개의 미나렛(첨탑)이 증축되어 교회 내에는 민발로 불리는 설교 단상도 장착되었다. 아야 소피아 자미로 불리게 된 이 정교회 대성당은 토프카프 궁전 쪽에 위치해 있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매주 금요일 예배마다 방문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스크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터키 공화국
1923년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었을 때 그리스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은 하기아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터키 정부는 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아야 소피아 박물관(Ayasofya Müzesi)으로 개조해 그 안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하지만 2013년 11월 13일에 아른츠 부총리가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다시 바뀌기를 원한다는 발언을 함으로써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건축
아야 소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손 꼽히는 동로마 제국의 건축물 중 하나이다. 아야 소피아 내부는 모자이크와 대리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고, 대단히 높은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 아야 소피아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러워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솔로몬, 내가 그대를 이겼다."(Νενίκηκά σε Σολομών)라는 유명한 말로 아야 소피아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주목할만한 요소와 장식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하에서는 내부 장식은 벽과 바닥의 대리석 슬라브와 돔 형태의 천장의 모자이크 디자인은 추상적이었다. 모자이크 중 베마의 스팬드럴에 있는 대천사 미카엘과 가브리엘은 현재 아야 소피아에 입장하면 볼 수 있다.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시인인 파울루스 실렌티아리우스(Paulus Silentiarius)가 장시(長詩)를 통해서 묘사한 당시 아야 소피아의 장식들은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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