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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의 저주, 무덤의 발견, 설에서 진실로 - 현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액트 2019.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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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타지마할

 현재 인도 아그라에 소재한 일종의 대영묘다. 인도의 대표적 랜드마크이며 인도 건축 예술의 위대한 유산이다. 

무굴 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자신의 총애하였던 부인 3번째 부인 뭄타즈 마할로 알려진 아르주망 바누 베굼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건축을 명하여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를 동원하여 건설하였다. 건축의 총 책임자는 우스타드 아마드 로하리로 알려져 있고, 뭄타즈 마할이 죽은지 6개월 후부터 건설을 시작하여 완공에 22년이 걸렸다.

타지마할은 페르시아, 터키, 인도 및 이슬람의 건축 양식이 잘 조합된 무굴 건축의 가장 훌륭한 예이다. 1983년 타지마할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인도에 위치한 무슬림 예술의 보석이며 인류가 보편적으로 감탄할 수 있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단순히 규모라든가 들이부은 예산 측면에서는 다른 건축물도 대단한 것이 많지만, 이처럼 완벽한 비율과 좌우대칭으로 보여지는 조형미, 주변 경관과의 배치, 빛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외관과 어우러져 해가 뜨고 짐에 따라 그 자태가 변하는 건축물은 흔치 않다. 무엇보다 오늘날 보기에도 감탄만 나오는 이런 건축물이 17세기 당시 기술로 22년만에 완공되었다는 것은 그저 경이로울 따름. 더군다나 이 모든 것이 단지 한 황제의 순애보적 집념만으로 그 당대에 착공하여 완성까지 봤다는 점에서 비하인드 에피소드 역시 누누이 회자되는 건물이기도 하다. 

특히 다른 거대 유적에서 느껴지는 중압감이나 화사함과는 거리가 먼 정갈미가 이 건물이 진정 칭송받는 이유다. 오히려 잡스런 기교보다는 비례를 중시한 담백미 때문에 절대적인 아름다움으로 회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세속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텃세 강한 다른 유적지들과 달리, 타지마할은 지금도 전세계에서 방문하는 무수한 방문객들이 발을 들여놓는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다만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안쪽은 그다지 볼 것이 없다. 특히, 타지마할은 많은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가봐도 감동보다는 어디서 본 듯한 느낌에 빠질 수 있다. 너무 큰 기대를 하고 가면 오히려 실망할 수도 있으니 심사숙고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흰색 대리석 돔의 영묘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타지마할의 규모는 더 크다. 네 귀퉁이의 높이 40미터의 미나레트는 수직으로 보이나 붕괴가 발생했을 때 건물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미세하게 바깥쪽을 향하고 있다.

 

샤 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직후 공사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손목을 잘랐다.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궁전을 만드려는 것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2007년 7월 7일 신(新) 세계 7대 기적에 선정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타지마할의 한 첨탑이 점점 기울고 있다는 것을 BBC방송에서 발견하였다. 인도의 아그라 야무나 강(Yamuna River Agra)에 타지마할이 세워졌는데 그 기초를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 흑단나무로 했는데 아그라 야무나 강(Yamuna River Agra)이 완전히 마르면서 지난 30년 동안 3.5cm가 기울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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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지마할의 건설을 주도한 샤 자한은 17세기 초 재위한 무굴 제국의 5대 황제로, 당시 제국의 국력은 악바르 대제와 자한기르의 치세를 거치며 가히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선대들에 비해 샤 자한은 정복보다 예술을 애호하는 문화 군주로서의 측면이 강했고 또한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관용적이었다. 그의 치세 중에 제국은 번영과 안정을 누렸고, 반란은 속속 진압되었으며 시민들은 평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아내가 죽기 전까지는.

 

타지마할의 건축 배경

무지막지한 애처가이기도 했던 샤 자한은 그가 털끝만큼의 오점도 없다고 형용한 황후 뭄타즈 마할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자, 큰 비통에 잠겼다. 그리고 그로 인한 실의를 장엄하기 짝이 없는 묘역을 조성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했다. 그는 곧장 제국 전역에서 막대한 세금과 인력을 징발해 당시까지 쌓아올려진 인도 건축 예술의 포텐셜을 한데 집중하도록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타지마할의 건축 배경이다.


제국의 수도 아그라에 타지마할이 축조된 22년 동안, 페르시아, 이탈리아, 프랑스등에서 기술자와 장인들을 초빙했고, 이웃한 미얀마는 물론이고 멀리 중국과 오스만 제국, 이집트에서까지 온갖 건축자재가 수송되었다. 제국의 재정 상태가 휘청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이 건물은 실용성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순수한 예술 건축물이었다. 오늘날이야 관광객이 몰려들어 수입을 내고 있을 뿐, 당시로서는 생산성이 전혀 없는 건물을 위해 제국의 국력이 소진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백성들은 이거 짓고 유지비 댄다고 죽어났다. 신하들도 보다못해 반대했지만 샤 자한은 그런 신하들을 힘으로 억눌러버리고 강행했다.

 

거울로만 바라보던 타지마할

만약 그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일찍 사망했다면 중도에 폐건물 꼴로 남아버렸을 가능성도 높지만, 다행이랄지 어떨지 그는 22년의 준공기간 내내 재위했음은 물론이고 완공된 1648년에서 10년이나 더 오래 재위한 장수 군주였다. 아마 폐위되지 않았으면 더더욱 오래 재위했겠지만, 끝내 자식인 아들 아우랑제브가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려 아그라 요새 탑에 가두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타지마할의 무리한 축조 탓에 세금을 각출당한 시민의 불만도 굉장했던 터이니 자업자득적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특히 샤 자한은 정사도 무관심한 암군이 되었던 터라 폐위당했을때 무굴 제국에서는 폐위에 불만을 품은 반란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아우랑제브 뿐만 아니라 다른 자식들도 암군이 된 아버지에게 진절머리가 난터라 굳이 아우랑제브가 아니더라도 다른 자식들에게 폐위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그는 탑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위대한 건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1666년 겨울까지 갇혀있다 죽었다.

아우랑제브는 죽은 아버지의 장례조차 제대로 치뤄주지 않은 자식이었지만, 샤 자한의 유해는 뭄타즈 마할과 마찬가지로 타지마할에 공동 안장하였다. 이후 아그라 요새 지하에서 타지마할과 연결되는 통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최소한의 배려였다는 설이 있다.

사실 샤 자한은 자신의 묘역으로 기존 타지마할과 대조되는 색채의 검은 타지마할을 따로 축조할 계획도 있었으며 심지어 이게 실각당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검은 타지마할을 계획했다는 것은 야사에 불과하다. 히스토리 채널에서도 타지마할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제법 진지하게 다루기도 했는데, 결과는 검은 타지마할보다는 거대 연못 쪽에 더 무게를 두었다. 이 검은 타지마할 설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그냥 전설로 치부한다. 1665년에 장 밥티스트 타베르니에르(Jean Baptiste Tavernier)라는 유럽 여행가가 아그라를 방문하고서 자신의 소설에 검은 타지마할이라는 것을 꾸며넣은 것이 전설의 시초가 된 듯 하다.

 

타지 마할(Taj Mahal) 사원의 전설이야기, 무굴제국황제 샤자한과 뭄타즈 마할의 무덤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던 타지 마할의 저주 이야기
 무굴제국의 황제 샤 자한이 자신의 사랑스런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궁전묘 타지 마할을 건축했다는 것은 내심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우리나라의 고려의 공민왕이 자신의 총애하는 부인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거대한 노국대장 신전을 지으려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으로, 그만큼 끔찍히 사랑했던 부인을 잃어버린 비통함과 애절함이 컸기 때문일 것으로 오히려 그 커다란 사랑의 마음을 높이 살 만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이 타지 마할을 건축하기 위해서 소요되는 엄청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었다는 것과 타지 마할 건축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착취했다는 점과 무려 22년이라는 엄청난 긴 시간을 들여서 무리해서 공사를 벌였다는 점이다.
 샤 자한이 거대한 건축물 타지 마할을 건축하기 위해서 전국에서 엄청난 세금을 무리하게 징발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게 했고, 이로써 백성들의 커다란 원성을 사기도 했다.
 새롭게 황제로 등극한 샤자한의 아들 아우랑제브는 집권한 후에 비이슬람교도에게 인두세를 거두려는 정책을 실시하자, 반대파에 의해서 암살당하고 만다.
 이렇게 샤 자한과 아우랑제브 모두 죽고 난 후, 무굴제국이 다스리는 인도지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고, 무굴제국은 여러개의 나라들로 분열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후에는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나라자체가 없어져버리고 만다.
 샤 자한의 집권초기까지만 해도 번영과 안정을 구가했던 무굴제국이 이렇게 삽기간에 붕괴되어 버린 것도 바로 '타지마할의 저주' 때문이라고 한다.
 17세기 초반까지 그렇게 번성했던 무굴제국이 이렇게 삽시간에 붕괴되고 몰락의 길을 간 것이, 타지 마할 완공 후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수많은 원혼들의 저주 때문이라는 하버드대학의 에바 코흐교수는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인도의 역사기록물에는 황제 샤 자한이 타지 마할 기술자들을 죽였다는 기록이나 인부들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기록들은 전혀 없다고 한다. 단지 무굴제국이 존재했던 일부지역에는 이같은 타지 마할의 참변이 전설이나 민담으로 전혀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샤 자한이 기술자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에바 코흐교수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전설로서 치부해 버렸다.

 

그런데 

2011년 파키스탄지역의 닐라 굼바드지역에서 한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 굼바드지역은 과거 무굴제국의 영토였다고 한다. 이 무덤을 파키스탄 고고학자들이 정밀조사를 벌인 결과, 무굴제국시대에 지어진 무덤으로 밝혀졌고, 무덤의 주인은 놀랍게도 제로니모 베로네오(Geronimo Veroneo)였는데, 그는 샤 자한의 지시에 따라서 타지 마할 사원을 총설계했던 건축책임자였다. 이 제로니모 베로네오의 시신에 많은 외상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는데, 제로니모 베로네오는 타지 마할 사원의 건축을 완공한 후에, 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던 것이 조사결과,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즉, 파키스탄지역에서 발굴된 타지 마할의 설계자 제로니모 베로네오의 시신분석을 통해서, 그가 황제 샤 자한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 사실로써 입증된 셈이다. 결국 옛 무굴제국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타지 마할을 설계하고 건축했던 뛰어난 기술자들이 악덕군주 샤 자한에 의해서 집단으로 몰살을 당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유명한 타지 마할은 수십 명의 기술자들의 희생과 2만 명의 불구자를 양산하고 만 슬픈 역사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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